한글 필기체 글꼴의 뒷 이야기한글 필기체 글꼴의 뒷 이야기

Posted at 2007. 1. 4. 13:20 | Posted in 한글 소식_정보_관련 글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글꼴이지만 도스용 한글 1.5 때 자주 쓰던 글꼴이 필기체입니다.  딱딱한 시스템 글꼴만 보다가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필체에 놀랐고 그 때문에 자주 사용을 했었죠. 그런데 2.0때부터 다양한 글꼴들이 쏟아지자 그 활용 빈도가 떨어지더니 지금은 거의 안 쓰입니다. 요새는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모양을 이쁘게하기 위해 웹폰트가  많이 쓰이는데 웹폰트에 손으로 쓴 느낌을 가지게하는 글꼴들도 상당수 있더군요.

이번에는 한글에 들어간 필기체 글꼴의 뒷 이야기에 대한 글입니다. 

출처는  한글 사용자 클럽입니다. 원본 글로 보기

번호:740/814 등록자:SCJINSUK 등록일시:95/04/15 21:20 길이:115줄
제 목 : 아래아 한글 필기체 글꼴의 뒷 이야기

안녕하세요. 진돌스입니다.
지난 일주일동안 너무 힘들고 바쁘게 살아서(더 바쁘게 사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마을 생활을 제대로 못했군요. 집에 들어와 잠만 자고 바로 나갔기 때문에...

오랜만에 글 하나 쓰려고요. 무슨 얘기를 할까 하다가, 문득 떠오른게 있어서 그걸 들려 드릴까 합니다. 바로 아래아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필기체 글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번 읽어 보세요. 아마도 미처 모르고 계셨던 이야기일테니...

지금엔 각종 전단물, 광고 간판, 자막 등등에 커다란 크기로 안 쓰이는 곳이 없는 아래아 한글 필기체는, 처음 나온 아래아 한글 버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죠.
제 기억으론 필기체 글꼴은 1.2버전부터 포함되었습니다. 그게 90년의 일입니다.

이 필기체 글꼴의 원형을 제공한 사람은, 당시 서울대학교 기악과(바이올린 전공) 학생이었던 '전성신'이라는 여학생입니다. 성신이는 89학번이고 1학년 때부터 컴퓨터 연구회에 신입회원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활동하던 여학생이었어요. 착하고 귀엽고...친구인 우리들이 조르면 바이올린을 꺼내서 재미있는 곡들을 연주해 주기도 했죠. 지금은 미국으로 유학가 있어서 가끔 소식을 들을 뿐입니다.

성신이는 글씨를 참 잘 썼어요. 동아리 방마다 있는 잡기장 있잖아요(저희는 그걸 열린글터라고 불렀는데), 거기다 글을 자주 써 놓고는 했는데, 워낙 알아볼 수 없는 악필들이 많아서인지 성신이의 글씨는 단연 눈에 뜨였죠. 성신이는 동아리 회지 원고를 프린터로 뽑지 않고 직접 써서 주기도 했어요. 이쁘니까....

거 뭐랄까, 그냥 귀엽고 동글동글한 필체는 아니었고, 왠지 끄적거리듯한 글씨면서도 보기 참 좋은 그런 글씨 있잖아요. 글씨 크기가 고르지 않고 큰 놈도 있고 작은 놈도 있고, 하나하나 보면 대충 쓴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게 참 균형을 잘 이루어서 예쁘다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게 드는 글씨였습니다. 이런 글씨로 쓴 편지 한번 받으면 정말 좋겠다 하는 그런.....

해가 바뀌고 90학번 신입회원들이 들어왔죠. 당연하게도 상냥하게 후배들을 대하는 성신이를 누나 누나 부르며 따르는 남학생들이 많았어요. 그 가운데 컴퓨터 실력이 뛰어나고 겸손해서 선배들의 많은 귀염을 받았던 후배 가운데, 형석이라는 녀석이 있었어요.(형석이가 이 글을 너그럽게 봐주어야 할텐데...)

형석인 좀 수줍음을 타는 편이어서, 성신이를 무척 좋아하면서도 별로 말도 못하고 그냥 속으로만 감추고 있었던거죠. 나중에 형석이 생일 때 진실게임하면서 다 들통이 났지만...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컴퓨터용 한글 글꼴을 디자인한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예요. 미적 감각과 함께 엄청난 노동을 감당할 수 있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죠.

한글 글꼴에 관심이 많던 형석이니만큼, 좋아하는 성신이 누나의 글씨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겠어요. 어느 날인가 FE라는 성능 좋은 글꼴 편집기를 하나 만들더니, 곧이어 성신이의 글씨를 아래아 한글에서 쓸 수 있게 글꼴 한 벌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모임방에 가보면 글꼴 에디터로 아무 말도 없이 뚝딱거리며 글꼴을 만들고 조합해 보는 형석이의 모습을 이따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형석이는 그 힘든 작업을 마침내 끝내고 나서 우리들에게 그 글씨를 선보였죠. 컴퓨터에서 찍혀 나오는 글씨라고는 명조체, 고딕체 등 정형적인 것만 보던 우리들 앞에, 프린터로 드르륵 드르륵 찍혀 나오는 성신이의 글씨를 닮은 글꼴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던지요. 동아리 사람들은 그걸 모두 글씨의 원주인인 성신이의 이름을 따서 '성신체'라고 불렀어요.

아무래도 그 성신체 글꼴은 실제 성신이가 쓰던 글씨와는 조금 차이가 나요. 초성, 중성, 종성의 벌수가 많지 않아서, 글자마다 다양한 스타일이 배어있던 사람의 손글씨를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무리였죠. 당사자인 성신이가 제일 민감하게 느꼈겠지요. '이거 내 글씨하고 많이 닮았니?'하고 조심스럽게 우리들에게 묻기도 했어요.

아무도 직접 그렇게 한글 글꼴을 손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라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저를 비롯한 동아리 회원들에게, 형석이가 만든 성신체 글꼴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 작업은 형석이가 선배 누나 성신이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렇게 불러도 되나)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이거지요. POWER OF LOVE!

처음엔 화면용 글꼴은 없었고 프린터 출력용 글꼴만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출력용 글꼴을 고쳐서 화면에도 필기체가 나오게 되었지요. 아래아 한글의 글꼴 설정 메뉴에도 '성신체'로 표시하려다가, 성신이의 완곡한 사양으로 그냥 '필기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 글꼴을 만든 형석이는 지금 선배형들을 따라 (주)한글과컴퓨터에 입사해서 열심히 아래아 한글 및 부속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들은 소식으론 여자친구도 생겼다고 하더군요. 후....

요즘은 참 필기체 글꼴들이 많죠. 그 글씨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건 원래 어떤 사람의 글씨였을까... 누가 그 글씨를 정성껏 다듬어 글꼴로 만든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진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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