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아 한글 개발한 이찬진 사장이 돈을 못번 이유는?아래아 한글 개발한 이찬진 사장이 돈을 못번 이유는?

Posted at 2009. 8. 24. 20:48 | Posted in 신문 기사

한글 문서를 작성할 때 사용하는 프로그램 중 '아래아 한글'이 있다.

 

1989년 1.0버전 출시를 시작으로 1990년 '㈜한글과컴퓨터'라는 회사가 설립됐고 우리나라 문서작성 프로그램 시장을 휩쓸었다.  학교에서,직장에서 '아래아 한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는 '아래아 한글'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MS워드'가 시장을 장악하지 못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

 

지금도 외국 업체나 기관과 문서를 주고받아야 하는 곳이 아니면 대부분 '아래아 한글'을 쓴다.

 

사업이 이 정도면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이찬진 사장은 억만장자가 됐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글과컴퓨터는 외환위기로 1998년 부도 위기까지 맞았다가 결국 이곳 저곳에 인수되는 처지가 됐다.

 

대부분 사람들이 돈을 내고 '아래아 한글'을 구입해 쓰기보다는 불법 복제를 통해 공짜로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찬진 사장은 큰돈을 만져 보지도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했고 1999년 포털 드림위즈를 설립해 지금까지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아래아 한글' 사례는 우리나라에서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가 쉽게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지식재산권이란 무엇인지,왜 보호돼야 하는지를 알아 보자.

 

⊙ 지식재산권과 경제적 특성

지식재산권은 지적 창작물에 부여된 재산권에 준하는 권리를 말한다.

지식재산권은 보통 산업 분야의 산업재산권(특허권 실용신안권 상표권 디자인권)과 문화예술 분야의 저작권으로 나뉜다.   산업재산권 중 특허권의 효력이 존속하는 기간은 특허 출원일로부터 20년이며,실용신안권은 그보다 짧은 10년이다. 저작권의 효력 존속 기간은 저작권자 사후 50년까지이다.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한 · EU FTA 협상 때 저작권 보호기간을 70년까지 연장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두 FTA 중 하나가 국회 비준을 받아 발효되면 바로 저작권법을 개정해야 한다.

 

지식재산권으로 보호받는 지식과 정보는 경제적인 용어로 '비경합적'이다.

 

수천만 명이 사용하더라도 감소하지 않으며 똑같은 지식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새로운 기술이나 특별한 신약품 제조방법,문학작품 음악 등 창작물 같은 지식과 정보는 책이나 음반 등의 형태로 생산돼 팔린다.  물론 생산 비용이 발생하지만 그 본질인 콘텐츠(알맹이)에 비하면 미미하다.

 

인터넷 등 정보기술(IT)의 발달은 지식과 정보를 보다 쉽게 더 적은 비용으로 전파하고 확산시킬 수 있게 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메모리에 책 수천만권 분량을 저장할 수 있고,인터넷을 통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책이나 음반에 비해 부피도 작고 훨씬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나온 것이다.

 

⊙ 카피레프트 주장도 대두돼

인터넷 등 IT 기술이 발달하면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면서 모든 지식과 정보는 인류의 공동 자원이며 타인과의 소통,공유 없이 생산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들을 이용한 지적 생산물은 자유롭게(공짜로)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카피레프트는 간단히 말해 저작권(copyright)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지적 생산물에 대한 접근권은 디지털 시대의 기본권으로 인식돼야 하며 저작권 특허권 상표권 등 지식재산권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본다.  프로그램 소스를 공개해 많은 프로그래머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한 리눅스나 온라인 협업을 통한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카피레프트의 사례로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이 주로 경제적 유인에 반응한다는 경제학의 기본 원리를 무시한 것이다.  카피레프트 측에서는 정보와 지식을 생산하고 창조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고 사회적 기여에 대한 적절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지만 현실에서는 경제적 보상만큼 강력한 유인책은 없다.

 

⊙ 인류의 공유 자산을 만드는 과정

카피레프트 시각에서 보면 지식재산권은 없어져야 한다.  인류가 모든 지식과 정보를 자유롭게 공유함으로써 더 나은 지식과 정보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재산권의 탄생 과정을 본다면 지식재산권이야말로 그 대의에 더 적합한 제도라는 걸 알 수 있다. 지식재산권은 제조업의 발달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서서히 확립돼 왔다. 동 · 서양의 장인들은 기술들을 전파하려 하지 않았고 도제식 방법으로만 전승해 왔다. 각 가문의 무술 비급이나 의술,약 조제 등도 마찬가지였다.

 

지식재산권이 없던 시기에는 지식이나 정보를 독점하고 있어야 개인들에게 유리했다.

 

지식재산권이 확립되면서 개인들은 자신의 지식이나 정보를 공개해 전파하는 게 독점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지식재산권은 개인의 지식을 공개하고 전파하도록 해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만드는 과정인 셈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 기업이 특허 기술을 개발하거나 지적 창작물을 만들어 지식재산권을 통해 보호받고 여러 형태의 경제적 보상으로 큰돈을 벌게 된다면 그 돈은 대부분 새로운 기술 개발이나 창작에 재투자되게 마련이다.

 

이는 시장경제 체제에서 이윤을 획득해 자본을 축적해 가는 과정의 축소판이다.

자본이 빨리 축적되면 인력과 자원을 더 쉽게 끌어모을 수 있고 더 나은 제품을 빨리 내놓을 수 있으며 소비자들도 혜택을 본다.  그래서 지식재산권은 꼭 필요한 제도이며 본래 취지에 맞게 지식재산권이 제대로 보호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게 중요한 과제다.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의 사례가 되풀이된다면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의 미래는 암울하다.   만약 '아래아 한글'의 불법 복제 유통이 없었다면 혹시 우리나라에도 MS에 버금가는 기업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정재형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jh@hankyung.com

 

출처 : 한국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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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개발자 정내권한글 개발자 정내권

Posted at 2008. 1. 21. 13:03 | Posted in 신문 기사

한글이 나온지 벌써 20여년이 지나갑니다.   한글 2007이 나온지도 벌써 1년이 훨씬 더 지났군요.  한글 하면 떠오르는 분이 누군가요? 아마도 대부분은 이찬진 사장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한글 1.0에서부터 한글 97까지 그분이 있었기에 한글이 나올 수 있었지요.  2000년까지만 해도 이찬진하면 소프트웨어 사용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컴퓨터를 배우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모르는 분들도 상당히 있을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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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2 - [한글 소식/정보/관련 글] - [기사] [한글과컴퓨터] 한글워디안 개발자들
2006/12/24 - [한글 소식/정보/관련 글] - 한글 3.0b 패키지에 들어있던 개발자의 편지 글

그렇다면 지금 한글을 진두 지휘하고 있는 분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모르시는 분들도 상당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배울 때 프로그램을 하나 하나 접하고 배우는 것도 하나의 일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즐거움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 개발자는 위대해보였고 누군가 궁금했고, 기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워낙 많은 프로그램들이 나오고 사무용 소프트웨어보다는 웹기반의 프로그램, 인터넷,  게임 등이 이슈라 한글 개발 진두 지휘를 하는지 모르는 분들도 상당수 일겁니다. 모르시는 분이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겠네요.

지금은 한글과컴퓨터 CTO로 있는 양왕성 이사가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한글 2002부터 한글 2004, 한글 2005, 한글 2007까지 꽤 오래동안 개발을 관리했고 그리고 앞으로도 꽤 오래동안 개발을 감독하지 않을까 합니다.

한글 개발을 지휘했던 이찬진 사장이 개발에서 손을 떼고 경영에 참여하면서부터 정내권 이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이전에 나모 소프트를 차린 박흥호 사장님도 많은 공적을 남겼습니다.  도스용 한글에서부터 주요 개발을 했고  한글 96이나 97,  한글 워디안, 한글 2002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한 분이 정내권 이사입니다.

지금은 별도의 모바일 관련 회사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한글 2002 때도 외부에서 한글 개발을 도우셨습니다.

그 분에 대한 기사가 매일 경제 신문에 나왔습니다.

다음은 매일 경제 2002년 2월 1일자 기사 내용입니다.

[컴퓨터가 학교이자 친구였죠]...정내권 사장

"어릴 적 몸이 불편해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나를 세상에 꺼내준 친구는 18살 때 만난 컴퓨터였다. 그 친구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주위에 물어볼 만한 사람 하나 없었다. 모르면 알 때까지 밤새워 책과 잡지를 읽고 또 읽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유.무선 연동 인터넷플랫폼을 개발하는 드림어플라이언스의 정내권(35)사장. 그는 남들 다 다니는 고등학교, 대학교는 고사하고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다. 동문친구 한 명이 없어 인터넷동창회 사이트인 아이러브스쿨에서 찾을 친구도 없다. 게다가 그의 주민등록증에는 '1급 장애인'이란 도장이 찍혀있다.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을 못 쓰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정 사장은 어릴 적 고향이 전남 보성군 회천면 율포해수욕장 근처의 어촌마을이라 휠체어를 타고 통학하기가 힘들어 학창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이제 설립된 지 1년 된 드림어플라이언스는 아직 직원 7명에게 월급줄 정도의 매출밖에 올리지 못해 그는 아직 소위 말하는 '벤처대박 CEO'축에도 못낀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개발자 사이에선 '정내권'하면 대표스타 '안철수'나 '이재웅'이라는 이름보다 더 유명하다. 그도 그럴것이 정사장은 지난 95년 한글과컴퓨터 기술담당이사로 있으면서 '아래아한글의 윈도우 버전'과 '아래아한글 2.0', '아래아한글 3.0' 등을 잇따라 시장에 내놓으며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찬진 전 한컴사장이 주로 기획을 했던 반면 실제 개발업무는 정사장이 뒤에서 진두지휘했기 때문에 그는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 '어르신'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한컴 경영난으로 잠시 IT업계에서 잠수하던 정사장(35)은 모바일기술을 가지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드림어플라이언스는 포털업체 드림위즈의 자회사로 유.무선 연동 플랫폼을 개발하는 업체. 그는 "영화배우들이 유명세를 타게 된 영화 속의 배역에 빠져 한동안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라며 "10년동안 머리속을 꽉 채우고 있던 '한글'이라는 이미지를 벗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 그는 지난해 드림어플라이언스를 운영하면서도 한컴측의 삼고초려로 '한글 워디안' 개발업무를 진행했었다. "정사장만큼 한글 프로그램을 잘 알고 제대로 개발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한컴측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한글워디안을 끝으로 한글은 모두 잊고 '모바일'이라는 새로운 배역에만 집중할 계획이다. 정사장은 "현재 모바일 콘텐츠 시장은 휴대폰벨소리와 게임 등 일부 오락메뉴만이 겨욱 명맥을 유지할 뿐 사실상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유선인터넷에서 사용하는 주요한 의사소통 기능을 휴대폰에 원활히 접목시키는 일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정보기기와 가전기기의 통합으로까지 발전될 것"이라고 말했다.
드림어플라이언스는 현재 자바기반의 유.무선 연동 플랫폼의 개발을 거의 완료했고 올해부터 매출이 본격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오로지 책만으로 컴퓨터와 씨름해 온 그에게 나름대로 독학비결을 물었다. 정 사장은 "재미만 있으면 된다"며 "나는 학교에서 ABCD를 배운 적은 없지만 컴퓨터를 공부하기 위해 귀찮은 영어도 하게됐고 지금은 원서도 그냥 술술 보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책만으로 공부하면 자신이 맞는지 틀렸는지 불안하지 않냐고 물으니 그는 "아무리 전문가라도 말을 하다보면 틀릴 수 있다"며 "하지만 역시 말보다는 문서가 틀릴 확률이 적다"고 답했다.

정 사장은 한글프로그램개발 공로로 지난 97년 동양대학교 명예 학사학위도 받았고 지난 2000년에는 '제 12회 정보문화상'도 수상했다. 그래도 학창생활에 대한 미련은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단순히 자기만족을 위한다면 대학졸업장도 나쁠 것이 없겠지만 지금 하고 있는 IT분야는 유명대학의 졸업장 하나보다는 좀더 간결한 프로그램 짜는 일이 더 중요하다"며 현재로선 별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답했다.

권민수 기자 [ 매일경제, 2002-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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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아 한글 탄생과 공 병우 박사아래아 한글 탄생과 공 병우 박사

Posted at 2007. 12. 7. 15:03 | Posted in 한글 소식_정보_관련 글
한글 탄생과 공 병우 박사에 관한 글로 한글 개발에 참여하였던 박흥호 선생님의 글입니다.


출처 : 호박동네

아래아 한글 탄생과 공 병우 박사

박 흥호 (한글 문화원 연구원 지냄, 현재 고누소프트 대표)


1988년, 부산남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발령 받음.
1988년 7월, 처음으로 컴퓨터를 사서 워드프로세서를 주로 사용함.
1988년 말, 이찬진 씨가 컴퓨터 잡지에 후배들과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고 있다는 글을 싫음.
1988년 초, 몇 차례 베타 버전 나옴. 세벌식 글자판 포함됨.
1989년 4월, 아래아 한글 1.0판 나옴.
1989년 8월, 공병우 자서전을 읽고 얼마 후 공 박사님을 만남.
1989년 12월, 교직을 두고 한글 문화원 연구원으로 시작.
1990년 10월, 한글 맞춤법 검사기 최초 개발하여 전시.
1990년 11월, (주)한글과컴퓨터 설립(한글 문화원 건물 안에 사무실 한 칸 사용)하면서 겸직.
1990년 12월, 한글과컴퓨터 이름으로 아래아 한글 1.5판 냄.
1991년 3월, 한글 문화원 연구원을 사직하고 한글과컴퓨터 일만 하기로 함.
1995년 3월, 윈도즈용 아래아 한글 3.0판을 넘기고 나자 공 박사님 타개 소식을 접함.
1995년 10월, 5년 동안의 한글과컴퓨터 생활을 정리하고 떠남.


저는 공 병우 박사님께서 돌아가시기 5년쯤 전에 한글 문화원 연구원 신분으로 1년 3개월 정도 모시고 가르침을 입었습니다.

제가 공 박사님을 ㅤ뵜을 때는 박사님의 연세가 여든 다섯이셨고, 비원 앞에 있는 와룡동 95번지의 5층 건물(예전에 공 안과 건물로도 사용했던 곳이라, 당시에도 공 안과 소유의 건물이었음)에 한글 문화원 명판을 달고 연구와 홍보에 매진하고 계시던 때였습니다. 둘째 아드님인 공 안과 원장님이 보내준 운전기사 한 명과 여비서 한 명이 있었습니다.

공 박사님은 매킨토시 컴퓨터로 직접 글을 쓰고 언론에 난 기사를 스크랩하고 홍보물을 만들어 배포하면서 일주일에 절반은 연구실 병원 침대에서 주무시곤 하셨습니다.

공 박사님은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이 찬진 씨만 만나서 지원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 선구자들을 두루 만나서 지원과 개발을 부탁하셨습니다. 지금은 너무 오래되어 낯선 이름들이 되어 일일이 열거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미국에서 다시 돌아오셔서 한글 문화원을 열었을 때, 아래아 한글보다 한두 해 먼저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출시한 "한 컴퓨터 연구소"(소장 강 태진; 지금은 씽크프리 대표)도 문화원 건물 5층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래아 한글이 세상에 나오자, 박사님은 플로피 디스크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세벌식 전용 아래아 한글을 부탁하여 "서울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한글 문화원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박사님의 지원으로 프로그래머인 정 내권 씨를 광주에서 데려와 함께 연구 활동을 하면서 홍두깨 DOS용 입력기를 개발하여 보급함으로써 세벌식 보급에 결정적인 물꼬를 틔었고, 우리 나라 최초로 "한글 맞춤법 검사기"를 예닐곱 달만에 개발하여 1990년 한글날 전시회에 한글 문화원 이름으로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정부 지원금으로 한글 스펠러를 몇 년째 연구하고 있던 교수님들이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이 찬진(84), 김 형집(86), 우 원식(88) 씨는 모두 회사도 없이 세 사람이 개인적으로 모여서 아래아 한글을 개발하여 판매하고 있었으므로 방위 근무 중이었던 이 찬진 씨가 저에게 (주)한글과컴퓨터 회사 업무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해 왔고, 당황한 제가 공 박사님께 의논했더니, 박사님께서는 앞날이 밝은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한글을 발전시키고 세벌식을 보급하는 길이 한글 문화원에 있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기에, 우선 겸직을 해 보면서 방향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저와 정 내권 씨가 문화원에서 한글과컴퓨터로 옮겨가면 한글 문화원에는 다시 박사님 혼자 남게 되시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불법 복제가 너무나 만연되어 있어서 소프트웨어를 팔아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시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으므로, 한글 문화원에 남아서 연구 활동을 하는 것이나 한글과컴퓨터를 만든다는 것이나 개인적인 생활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아래아 한글 입장에서는 학생 두 명과 한 명의 방위로 된 개발팀에서 회사와 사무실도 생겼고 상근 개발자 두 명이 더 생기는 일이었으므로 개발에 보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5년 동안 저는 아래아 한글 개발 부문장을 맡아서 개정판이 출시될 때마다 사용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글 기계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에는 소임을 어느 정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세벌식 보급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공 박사님께 마음의 빚이 큽니다.

아래아 한글 3.0 윈도즈용 출시용 원본을 넘기고 곧바로 박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는데, 어느새 다시 10주기라니 제 한 몸 돌보느라 박사님의 큰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고 있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공 박사님의 뜻과 가르침은 저희 후학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뜨겁게 살아남아 이어져 가고 있다는 말씀 드리고 싶으며, 앞으로 조금이나마 박사님의 뜻을 빛낼 수 있는 일에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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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워드프로세스의 역사한글 워드프로세스의 역사

Posted at 2007. 1. 17. 13:14 | Posted in 신문 기사

한글 워드프로세스의 역사에 대해 정리한 글로 디지털 타임즈 2000년 6월 26일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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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글워드프로세서는 무엇일까? 초기 워드프로세서는 지금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컴퓨터 보급이 일반화되기 전인 80년대 초, 한동안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통합된 형태인 전용기기가 인기를 끌었다.
83년 국내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전용기기인 큐닉스의 '글마당'과 그 뒤를 이어 고려시스템의 '명필', 금성사의 '장원' 등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과 같은 SW 패키지 형태의 한글 워드프로세서는 84년경 탄생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박현철 씨가 애플컴퓨터 기반의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한 것. 기능이 미약해 최초의 워드프로세서로 볼 것이냐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글Ⅲ', '중앙한글' 등 애플컴퓨터 기반의 한글워드프로세스가 80년대 중반부터 자리잡게 하는데 기여했다.
애플컴퓨터보다 대중적인 MS DOS 환경의 한글워드프로세서가 나온 것은 이 보다 늦은 85년경. 삼보컴퓨터가 보석글 시리즈가 최초다.
삼보를 필두로 당시 쌍용컴퓨터, 삼성전자, 금성소프트웨어, 대우통신, 삼성전관, 현대전자 등 주요 PC 메이커들이 잇따라 자체 워드프로세서를 내놓고 자사의 PC에 번들해 공급했다.
가나다라(금성), 프로워드(대우통신), 세종(쌍용), 바른글(현대), 글벗(삼성전자), 한글워드(테레비데오) 등이 초창기 제품들. 이중 보석글은 최초의 대중화된 한글워드프로세서로 불릴 만하다.
보석글의 인기는 그때 당시 보석글과 한글코드가 일치하는 프린터인 삼보 엡손 기종이 프린터 시장을 장악할 만큼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보석글은 국산 워드프로세서가 아니었다.
'T/Maker Research'라는 회사의 제품을 한글화시킨 것에 불과했던 것. 이는 팔란티어소프트사의 소스프로그램을 들여온 금성SW 등도 마찬가지. 더구나 이들 제품은 프린터 드라이버 등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해, 프린터를 하려면 문서 앞뒤로 태그를 붙여야하는 등 명실상부한 워드프로세서 제품으로 보기에는 기능이 취약해 불편이 많았다.
이 때문에 국산 워드프로세서의 원년은 89년으로 기억된다.
우리 손에 개발된 진정한 국산 한글워드프로세스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컴퓨터연구소의 한글2000이 스타트를 끊었다.
85년 10월 발표된 쌍용의 '세종'과 86년 말 발표된 현대전자의 '바른글'도 국내 프로그래머에 의해 개발됐지만, 기능상 한글2000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한글2000은 2,3벌식 한글자판, 조합형과 완성형 한글코드 복수지원, 레이저프린터 인쇄 가능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성능으로 국산 워드프로세서 역사상 이정표로 기록될 만한 제품이었다.
그러나 한글2000은 곧바로 등장한 아래아한글에 영광의 자리를 내줘야 했다.
대학생들이 모여 개발한 아래아한글은 안정성이 매우 뛰어났고, 프린터 드라이버 지원은 물론 블록 편집, 폰트 드라이버 지원 등 그야말로 워드프로세스다운 한글 워드프로세서였다. 뛰어난 기능과 베타버전의 무료 배포에 힘입어 아래아한글은 빠른 속도로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1.52 버전의 경우, 뛰어난 레이저 프린팅 기능으로 단행본 등 경인쇄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당당히 제값을 받고 팔려나갔다.
한컴퓨터연구소가 뒤늦게 '사임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래픽' 기능 등을 강조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아래아한글은 한글 워드프로세서 시장에서 승승장구해 80%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같은 기세도 93년, MS의 독점력이 한껏 발휘된 '윈도'의 출현과 함께 암초에 걸리고 만다.
아래아한글의 윈도 지원이 때늦은 틈을 타 국산 신예 워드프로세서들이 대량으로 쏟아진 것. 삼성의 훈민정음을 비롯해 삼보의 보석글 프로, 창인의 지필묵, 핸디소프트의 아리랑, 큐닉스의 글마당, 휴먼컴퓨터의 글사랑, 한메소프트의 파피루스 등이 경쟁에 뛰어들면서 국산 워드프로세서의 제 2차 대전이라고 할만한 상황이 벌여졌다.
그러나 아래아한글의 저력은, 이같은 폭풍을 잠재울만큼 대단했다.
안정성이 현저히 떨어졌던 첫 윈도용 버전을 곧바로 개선시켜 성공리에 시장 진입했으며, 다른 국산 워드프로세서 진용까지 흡수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아래아한글에 보내는 사용자들의 변함없는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잠시의 영광도 그뿐, 국산 워드프로세서의 수난기가 도래했다.
일말의 틈새도 놓치지 않고 MS워드가 맹공을 퍼부었고, 결국 빈사상태까지 몰고 갔다.
사실상의 세계 표준을 손에 쥔 외국SW에 '우물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국산SW가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미약했던 것. 아래아한글 포기 선언은 국내 SW 산업계에 엄청난 충격과 질타를 던졌고, 국산SW의 활로에 대해 진지한 각성과 고민이 시작됐다.
가까스로 기사회생한 한글과컴퓨터는 이제 중국, 일본 등 해외 워드프로세서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7월에는 3년여의 공백 끝에 명실상부한 윈도용 엔진을 장착한 한글 워디안 제품도 출시할 계획이다.
국산 SW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나아가야 있는가? 한글 워드프로세서는 대표적인 국산 SW로 일찌감치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요구받았고, 아직 답변이 끝나지 않았다.
한글 워드프로세스는 바로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바로미터인 것이다.
<권정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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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오’들고 돌아온 이찬진 드림위즈 사장‘티비오’들고 돌아온 이찬진 드림위즈 사장

Posted at 2007. 1. 15. 11:23 | Posted in 한글 소식_정보_관련 글
이찬진 드림위즈 사장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재기할 준비를 하고 있군요.    한글 1.0에서 한글 97까지 개발을 진두지휘하다 IMF때 경영난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드림위즈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는데 요새 드림위즈의 실적이 예전보다 못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예전에 자주 들렀었는데 요즘은 메일을 읽을 때만 가끔씩 들어가는 형편이니 말입니다.

이찬진 사장은 참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게 남들보다 한발짝씩 앞서다보니 시장에서 인기를 끌지 못하고 다른 후발주자에게 밀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후발 주자가 워낙 잘해서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워드프로세서 한글 이외에 이찬진 사장이 했던 걸로 심마니와 네띠앙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검색엔진이었는데 잘 발전시켰으면 지금의 네이버 정도로 발전하였을 것인데 천리안에 넘긴 후 심마니는 거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고, 커뮤니티인 네띠앙 역시 이찬진 사장이 만들어 한 때는 최대 포털 상위에 들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부도가 나서 없어져 버렸습니다.  드림위즈로 간 후 어느 정도 성과를 내는 듯 하더니 지금은 조용하군요.

이번에 TV를 이용한 새로운 사업구상을 하나 봅니다. 지난 번에도 기사를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 하는 새로운 구상이 성공했으면 합니다.

다음은 기사 내용입니다.
출처는 이코노믹 리뷰입니다.


“똑똑한 TV로 재기할 겁니다”

녹화·동영상 재생·음악 파일재생·사진보기,‘티비오’하나로 해결
2년 연구 끝 개발… 多채널 동시 녹화, 연속극 반복 예약녹화도 가능
인터넷 연결해 출장 가서도 볼 수 있어…2년 간 10만대 판매가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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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발명품 중 TV만큼 인간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얼마나 될까요. 자동차와 휴대폰 정도를 제외하고는 아마 없을 겁니다. 그만큼 TV는 인간에게 전혀 새로운 형태의 생활방식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V와 방송이 점점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시간에 맞춰 귀가하고, 못 보면 재방송을 기다립니다. TV가 좀더 사용자 중심이 될 수는 없을까. 저희 제품 ‘티비오’는 이런 고민의 산물입니다.”

이찬진(43) 드림위즈 사장이 신개념 PVR(개인영상저장장치) ‘티비오(TVIO)’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찬진 사장은 국내의 대표적인 소프트웨어 업체인 ‘한글과컴퓨터’사의 설립자다. 이 사장은 경영난으로 한글과컴퓨터의 경영권을 내준 이후 네띠앙과 드림위즈 등을 설립해 누구보다 먼저 인터넷 포털 사업에 눈을 돌렸지만, 지난 2000년 드림위즈 기업공개(IPO) 당시 분식회계 의혹에 휘말리면서 힘겨운 나날을 보냈고 그 사이 그가 경영을 맡고 있는 드림위즈는 다음, 네이버 등에 인터넷 검색·커뮤니티 시장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때문에 드림위즈는 지난해 말 누적된 손실로 악화된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감자를 단행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업가의 모습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기자에게 두 시간 가까이 앞으로 다가올 TV의 미래와 TV와 관련된 새 사업구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마냥 호기심이 넘쳤다.

그가 지난해 12월부터 시장에 선보인 신개념 PVR, ‘티비오’는 타임머신 TV처럼 생방송을 중지시킨 후 이어보거나, TV프로그램을 예약 녹화하고 동시에 여러 채널을 녹화하는 PVR 기능에 PC와 네트워크로 연결돼 인터넷을 통해 다운로드받은 영화, 드라마 등의 동영상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일종의 통합미디어센터다.

이 사장은 “쉽게 말해 타임머신 TV와 디빅스(Divx)플레이어(인터넷으로 다운로드한 동영상 파일을 TV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기기)를 하나로 묶어 PC에 연결시켜 모든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TV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사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처럼 새로운 분야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얼리어댑터’로서 타고난 그의 기질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PDA를 만들어 쓸 정도로 IT기기란 IT기기는 빼놓지 않고 섭렵할 정도로 얼리어댑터인 이 사장의 눈에 PVR이 처음 들어온 것은 2년 전.

“미국에 가보니 이미 자신이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녹화하는 기능을 가진 PVR이 상당히 대중화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니 이 제품은 TV에만 묶여 있어 TV프로그램을 녹화하는 기능 외에는 거의 쓸모가 없더군요. 그런데 이 제품을 PC와 네트워크로 연동해 녹화된 TV프로그램뿐만이 아니라, 다운로드한 동영상 파일, 음악파일, 디카로 찍은 사진 등도 재생할 수 있도록 하면 제법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이 사장은 2년 동안 제품 개발과 제품에 탑재될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골머리를 싸맨 끝에 지난해 12월 첫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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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고민 덕분에 티비오는 앞서 언급한 기능 외에 똑똑한 기능을 많이 가지고 태어나게 됐다.

“한 번밖에 예약 녹화가 안되는 기존의 타임머신 TV에 비해 티비오는 연속극을 매일 반복해서 녹화해놓았다가 한번에 모두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전자프로그램가이드(EPG)를 통한 케이블TV의 모든 프로그램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다채널 녹화가 가능하고 PC와 연결하면 인터넷을 통해 원격지에서의 녹화영상 재생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사장의 말이다.

이 사장이 티비오에서 사업 가능성을 발견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IT와 멀티미디어 환경이 사용자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일고 있는 UCC(사용자제작콘텐츠)붐에서 보듯이 이제 IT와 멀티미디어 환경은 철저히 사용자 중심으로 가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미디어는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서비스를 시작한 하나TV를 비롯해 앞으로 시작될 IP-TV는 사업자 중심의 일방적인 서비스입니다. 잘 팔리는 콘텐츠, 인기 있는 콘텐츠만 서비스해주니까요. 정작 사용자 개개인이 보고 싶은 콘텐츠는 없습니다. 저만 해도 하나TV를 한두 달 써봤는데 바로 해지했습니다. 제가 보고 싶어하는 다큐멘터리같은 것은 거의 없더군요. 서비스 사업자 중심으로 콘텐츠가 편성되고 정작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콘텐츠는 없는데도 매월 요금을 내야 하는 IPTV 모델이 과연 성공할지 의문입니다.

티비오는 TV를 방송사업자나 서비스 사업자 중심이 아닌 사용자 중심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력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이처럼 티비오에 거는 희망이 적지 않으면서도, 그동안 겪었던 어려움 때문일까, 이 사장은 정작 티비오의 성공가능성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워 했다.

“핸드폰 사용자 중에서 문자메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 30%를 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점을 몰라서 안 쓰는 게 아니라 주부들과 노년층에게는 사용이 까다롭기 때문이죠. 티비오도 사용자가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에 자유롭게 새 프로그램을 깔고 TV에 케이블을 스스로 연결할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하기 때문에 시장이 폭발적으로 활성화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기존의 케이블 TV나 VOD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용자들을 중심으로 한 틈새시장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게 이 사장의 전망이다.

그는 “지난 몇 년 간 국내에서 팔린 디빅스플레이어가 20만∼30만대쯤 된다고 하니 앞으로 2년 동안 10만대 정도 팔려나가면 성공인 셈”이라며 구체적 수치까지 내놓는다.

‘아래아 한글’부터 ‘심마니’와 ‘네띠앙’까지 늘 시대를 앞선 생각과 서비스를 선보이면서도 늘 어려움을 겪어 온 이찬진 사장. 그가 다시 시대를 앞서서 내놓은 제품 ‘티비오’가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 서울대 기계공학과 84학번인 이찬진 사장은 재학시절 동료들과 함께 한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인 ‘아래아 한글’을 개발해 일약 한국 IT벤처를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이후 이 사장은 인터넷 검색사이트 심마니,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네띠앙 등 남들보다 한발 앞선 아이디어로 한국의 IT사업을 이끌어 왔으나, 1999년 자신이 설립한 한글과컴퓨터가 경영난에 빠져 경영권을 내놓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대공대ㆍ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선정돼기도 한 그는 지난 1996년 배우 김희애(40)씨와 결혼해 슬하에 기현(9)과 기훈(7)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이형구 기자(lhg0544@ermed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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