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다고 생각하는 일에 미쳐라""즐겁다고 생각하는 일에 미쳐라"

Posted at 2009. 5. 19. 14:17 | Posted in 신문 기사

한글과컴퓨터 자회사인 한컴씽크프리 대표였던 강태진 이사가 KT로 이전한 후 인터뷰 내용이 한국경제신문에 실렸군요. 기사를 소개합니다.

 

강태진 전무는 전 한컴씽크프리 대표이자 국내 기술 벤처기업가 중 하나로 알려진 인물이다.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전설적인 프로그래머로 유명하지만 사업가로서는 많은 실패를 겪었다.

1988년 '한글2000'을 한글과컴퓨터의 '아래아한글'보다 1년 먼저 앞서 개발하여, 사업을 시작했지만 1994년에 MS워드가 나와 어려움을 겪고 결국은 한컴에 인수되었다. 1999년부터는 미국인 캔 리와 합작해 실리콘 밸리에 싱크프리를 설립해 벤처 신화를 이어갔다.

씽크프리는 본바닥 미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MS Office와 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미국의 초고속인터넷망의 확산 속도가 느려 매출이 오르지 않아 투자자들의 불만이 불거져 한컴에 인수 된다. 한컴싱크프리의 대표로도 연구개발에 몰두했지만 2007년 말에 퇴사했다.
 
그는 한글워드프로세스를 처음부터 만들어냈으며 ISO에서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유니코드의 한글 부분 표준을 만드는 일에 기여했다. 천재 프로그래머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다섯 차례의 사업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지난해 KT 전무라는 타이틀로 신사업 본부를 책임지며 화려하게 돌아왔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하고야 만 그의 인생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90년대에 선글라스를 끼고 출근한 유일한 CEO셨다면서요?

저는 남이 어떻게 하든지 별로 신경을 안 쓰고 남이 안가는 길을 가고 싶어요. 아마 한국에서 계속 자랐다면 저도 양복을 입고 출근했겠죠. 중학교까지 한국에서 자라고 고등학교때 토론토에서 살기 시작했어요. 캐나다에서 15년쯤 살았어요. 캐나다는 문화적으로 다문화 사회이기 때문에 그 곳에서 교육을 받은 것에 대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미국 직원들과 일을 하고 느꼈던 건 그들이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죠. 유럽만 해도 웬만한 사람은 3~4개 국어를 하고 다른 배경을 갖는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배려와 이해가 기본적인데 미국 사람은 문화 자체가 자기들 중심이어서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캐나다는 역사적으로 프랑스계와 영국계랑 대립했었고 퀘백주는 프랑스계가 많아요. 그래서 언어가 단일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소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법과 제도가 잘 정립되어 있거든요. 기본적으로 이해와 배려가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어요.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양해 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캐나다에서 교육을 받고 훈련되어서 갖는 감성이 제 삶에 매우 큰 도움이 됐어요. 그래서 선글라스에 반바지를 입었나봐요.(웃음)
 
스스로의 인생을 성공했다고 보세요?

사업을 하는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땐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돈을 버는 게 사업의 목표인데 저는 돈을 많이 못 벌었어요. 아시다시피 실패를 여러 번 했거든요. 특히 아이들에게는 제 인생이 좋은 롤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들에게 좋은 어드바이스와 커리어를 위해 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아이들한테 그런 걸 해줄 수가 없어요. 저도 인생을 잘 모르겠어요. 뭐가 괜찮은 인생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거든요. 그런데 앞으로 10년, 20년 뒤를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제가 아는 건 그 순간 제일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에 미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내가 게으르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잘 모르지만 그때그때 심심한 건 너무 싫어서 없으면 무엇을 만들어서라도 했어요. 한번 하면 끝장을 봐야하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결론은 내가 계획했던 대로 되지는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결과는 있었던 거 같아요. 사실 전략 없이 살았던 거죠.(웃음) 그렇지만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분야에서는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해요. 열정이 없으면 결국은 지칠 수밖에 없거든요. 아직도 여전히 밥은 먹고 살고 있고 지금도 내가 재밌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학교 다니실 때 공부만 하셨을 것 같지가 않은데요?

사실 많이 놀았어요.(웃음) 대학원 때 연극 연출을 했어요. 석사는 보통 1년이면 따는데 논문 쓸 시간에 연극을 하느라고 5년 만에 냈거든요. 거의 기록이에요. 제가 연출했던 연극이 그 때 굉장히 흥행에 성공을 했어요. 캐나다에서 매우 한국적인 소재를 가지고 무대에 해금치고 장구를 쳤어요. 축제 같은 연극을 해서 토론토 연극제에 초청받고 표는 2주 동안 계속 매진이었어요. 정말 재밌게 살았어요. 대학 3학년 땐 수업도 안 들어가고 춤만 췄구요. 그때는 대학원 갈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을 정도로 학점이 안 좋았어요. 하지만 인생 공부를 많이 했어요. 진짜 거짓말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사람이 사는 모습은 소설가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극적이에요. 그래서 제가 소설 한권은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런 걸 경험하고 봤으니까요.

수필집을 쓰셨던데 소설도 써 보시지 그랬어요?

 제 나이 35살에 '내 사랑 내 사업 내 방식대로'라는 수필집을 썼어요. 지금은 절판됐지만 가끔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제가 재판했어요.(웃음) 그 수필집에서도 제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 썼었나봐요. 명진출판사에서 소설을 써보지 않겠냐고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사실 예전에 출장때문에 비행기에서 11시간을 타고 가면서 시놉시스를 생각했거든요. '기계도 사랑을 할까' 라는 제목이에요. 주인공이 컴퓨터공학 교수인데 사회적으로 적응을 잘 못하는 사람이에요.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어서 인터넷으로 접속해서 야한 스토리를 읽고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죠. 주인공은 사람 대신에 기계가 되고 싶어 해요.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면서도 야한 이야기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다 한글과 컴퓨터에 들어가서 일하다 보니 소설을 끝낼 시간이 없어요. 하지만 소재로 썼던 내용들이 이제는 시대에 안 맞아서 소설로 나오려면 많이 고쳐야 될 거에요.(웃음)

사업 실패로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1994년에 회사가 인수되기 전에 내가 시도했던 사업의 상황이 바뀌면서 잘 될 가능성이 안 보이는 거에요. 집을 담보로 해서 대출도 받았었기 때문에 힘들었어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투자자들에 대한 투자금에 대한 회수도 불가능해 보였어요. 상황을 헤쳐 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아서 절망적이었어요. 한달 정도는 회사에 나가도 일이 안 잡히고 전화가 오면 심장이 빨리 뛰면서 걱정부터 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투자자들은 몰랐는데 저 혼자 고민하고 있었던 거였어요. 그때 이렇게 사느니 죽으면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해서 차를 몰고 한강 고수부지에 갔어요. 비까지 오는데 한강을 보고 있다가 여기서 그냥 차를 세게 몰아서 죽을까 생각했어요. 그러다 한편으로 정말로 죽을 거면 내가 뭘 못할까. 다시 해보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있는데 한글과컴퓨터에서 회사를 인수해서 벗어났어요.
씽크프리 시작하고 나서 닷컴버블이 꺼지고 2003년에 힘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직원을 감원하고 임원들은 급여를 반만 가져가고 나는 1년치 급여를 못 가져갔어요. 가족들이 미국에 있었는데 차를 팔아서 나온 돈이랑 신용카드로만 1년을 버텼어요. 어떻게 버틸까 했는데 또 살아지더라구요.(웃음)

사무실에 첼로가 보이는데 취미로 연주하시나봐요.

어렸을 때 첼로를 배웠는데 요즘은 잘 못해서 레슨을 다시 받고 있어요. 오랫동안 안쳐서 손이 굳었어요. 집에는 어쿠스틱 첼로가 있는데 주중에는 늦게 들어가고 연습할 시간이 없거든요. 주말에만 연습하면 손이 어느새 굳어요. 생각다 못해서 전자 첼로를 사서 사무실에서 머리가 안돌아가거나 골치 아플 때 잠깐씩 머리도 식히고 연습해요.

지금 살고 계신 '조린헌'이라는 집이 기사와 뮤직비디오에도 나오던데요?

남자들은 보통 자동차에 관심이 많지만 캐나다에서 살아서 그런지 너무 요란하고 좋은 차를 타는 게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어요. 대신 어렸을 때부터 집에 관심이 많은 이유가 거기서 시간을 많이 보내거든요. 근데 남들과 똑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싫거든요. 집에 사람을 초대해서 같이 밥 먹고 얘기하는 거 좋아하는데 집에 주인의 개성이 보이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잖아요. 여기는 내 공간이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으면 좋겠어요. 결혼하기 전에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스쿨버스 의자를 가져다가 집에 쇼파로 가져다 놓고 했어요. 1989년에 한국에 들어와서는 오래된 한옥을 찾아서 지붕과 기둥을 남겨두고 벽을 철거해서 한 10년을 살았어요. 한옥이 손이 많이 가길래  철거해서 다시 다세대로 만들었어요. 그 집이 '조린헌'이에요.

문화 생활은 주로 어떤 것을 하세요?

현대무용 공연 보는 걸 좋아해요.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인간의 움직임을 보면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특이해요. 무용 공연은 움직임, 음악, 조명까지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에요. LG아트센터에서 하는 건 웬만하면 보려고 해요. 대학로 아르코 극장에서는 현대무용공연을 많이 하기 때문에 종종 가요. 연극을 했던 경험 때문에 뮤지컬보다는 무용 공연이 더 좋은 거 같아요. 연극은 여전히 좋아하구요. 네크라슈스의 햄릿 공연처럼 멀티미디어적인 공연이 좋아요.

프로그래밍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처음에 소프트웨어에 빠졌던 이유는 내가 확실하게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은 내가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어요. 조그마한 우주 속에 내가 신이 되는 점이 희열을 줬어요. 컴퓨터 앞에 앉아서 프로그래밍할 때는 사흘 밤낮동안 날을 샜어요. 기절을 하는 경우는 있어도 졸지는 않았어요. 끊임없이 프로그램과 교류가 있기 때문에 절대 졸 수 없어요. 안타까운 건 점점 산업화되어 가기 때문에 프로그래밍의 규모가 너무 커졌어요. 하지만 요즘엔 도리어 좋게 변하고 있어요. 소프트웨어의 낭만적인 시대가 돌아왔다고 생각해요. 애플의  애플스토어를 보면 모바일용 작은 애플리케이션이 나오고 있어요. 똑똑한 친구들이 SK나 nhn같은 좋은 회사에서 나오거나 아니면 회사를 다니면서 모바일용을 만들고 있어요. 혼자서 하거나 둘이서 하는 게 많아요. 누구나 쉽게 애플스토어에서 올릴 수 있기 때문에 1~2년 만에 apstore에 3만개의 소프트웨어가 벌써 만들어져 있어요.

아이디어만 반짝이면 되는 시대가 다시 오고 있어요. 소프트웨어에 들어간 정신과 감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아이폰에 알람 기능이 있어요. 원래 알람의 기능은 정해진 시간에 울리는 거잖아요. 그런데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가고자하는 정거장의에 도착시간을 알 수 없어 졸다가 목적지를 놓칠 수 있어요. 아이폰의 알람은 GPS가 탑재 되어 있어서 장소를 정해 미리 알려주는 거죠. 그것도 하나의 감수성이라고 생각해요. 역시 중요한 것은 경험이고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보는 감수성이라고 생각해요.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에요.

자기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새로운 일이 뭐든지 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으면 주변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것 같아요.  보통 우울한 사람 옆에 있으면 같이 우울해지잖아요. 그런 것처럼 내가 정말 열정을 갖고 즐거우면 전염성이 있어서 주변 사람도 비슷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세상엔 사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거든요. 와이프가 저랑 같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해서 항상 행복하지는 않을 거 같아요. 사업 실패도 많이 했잖아요. 하지만 나랑 살았던 건 심심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더라구요.(웃음)

한경닷컴 bnt뉴스 서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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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워드프로세스의 역사한글 워드프로세스의 역사

Posted at 2007. 1. 17. 13:14 | Posted in 신문 기사

한글 워드프로세스의 역사에 대해 정리한 글로 디지털 타임즈 2000년 6월 26일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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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글워드프로세서는 무엇일까? 초기 워드프로세서는 지금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컴퓨터 보급이 일반화되기 전인 80년대 초, 한동안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통합된 형태인 전용기기가 인기를 끌었다.
83년 국내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전용기기인 큐닉스의 '글마당'과 그 뒤를 이어 고려시스템의 '명필', 금성사의 '장원' 등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과 같은 SW 패키지 형태의 한글 워드프로세서는 84년경 탄생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박현철 씨가 애플컴퓨터 기반의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한 것. 기능이 미약해 최초의 워드프로세서로 볼 것이냐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글Ⅲ', '중앙한글' 등 애플컴퓨터 기반의 한글워드프로세스가 80년대 중반부터 자리잡게 하는데 기여했다.
애플컴퓨터보다 대중적인 MS DOS 환경의 한글워드프로세서가 나온 것은 이 보다 늦은 85년경. 삼보컴퓨터가 보석글 시리즈가 최초다.
삼보를 필두로 당시 쌍용컴퓨터, 삼성전자, 금성소프트웨어, 대우통신, 삼성전관, 현대전자 등 주요 PC 메이커들이 잇따라 자체 워드프로세서를 내놓고 자사의 PC에 번들해 공급했다.
가나다라(금성), 프로워드(대우통신), 세종(쌍용), 바른글(현대), 글벗(삼성전자), 한글워드(테레비데오) 등이 초창기 제품들. 이중 보석글은 최초의 대중화된 한글워드프로세서로 불릴 만하다.
보석글의 인기는 그때 당시 보석글과 한글코드가 일치하는 프린터인 삼보 엡손 기종이 프린터 시장을 장악할 만큼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보석글은 국산 워드프로세서가 아니었다.
'T/Maker Research'라는 회사의 제품을 한글화시킨 것에 불과했던 것. 이는 팔란티어소프트사의 소스프로그램을 들여온 금성SW 등도 마찬가지. 더구나 이들 제품은 프린터 드라이버 등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해, 프린터를 하려면 문서 앞뒤로 태그를 붙여야하는 등 명실상부한 워드프로세서 제품으로 보기에는 기능이 취약해 불편이 많았다.
이 때문에 국산 워드프로세서의 원년은 89년으로 기억된다.
우리 손에 개발된 진정한 국산 한글워드프로세스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컴퓨터연구소의 한글2000이 스타트를 끊었다.
85년 10월 발표된 쌍용의 '세종'과 86년 말 발표된 현대전자의 '바른글'도 국내 프로그래머에 의해 개발됐지만, 기능상 한글2000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한글2000은 2,3벌식 한글자판, 조합형과 완성형 한글코드 복수지원, 레이저프린터 인쇄 가능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성능으로 국산 워드프로세서 역사상 이정표로 기록될 만한 제품이었다.
그러나 한글2000은 곧바로 등장한 아래아한글에 영광의 자리를 내줘야 했다.
대학생들이 모여 개발한 아래아한글은 안정성이 매우 뛰어났고, 프린터 드라이버 지원은 물론 블록 편집, 폰트 드라이버 지원 등 그야말로 워드프로세스다운 한글 워드프로세서였다. 뛰어난 기능과 베타버전의 무료 배포에 힘입어 아래아한글은 빠른 속도로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1.52 버전의 경우, 뛰어난 레이저 프린팅 기능으로 단행본 등 경인쇄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당당히 제값을 받고 팔려나갔다.
한컴퓨터연구소가 뒤늦게 '사임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래픽' 기능 등을 강조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아래아한글은 한글 워드프로세서 시장에서 승승장구해 80%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같은 기세도 93년, MS의 독점력이 한껏 발휘된 '윈도'의 출현과 함께 암초에 걸리고 만다.
아래아한글의 윈도 지원이 때늦은 틈을 타 국산 신예 워드프로세서들이 대량으로 쏟아진 것. 삼성의 훈민정음을 비롯해 삼보의 보석글 프로, 창인의 지필묵, 핸디소프트의 아리랑, 큐닉스의 글마당, 휴먼컴퓨터의 글사랑, 한메소프트의 파피루스 등이 경쟁에 뛰어들면서 국산 워드프로세서의 제 2차 대전이라고 할만한 상황이 벌여졌다.
그러나 아래아한글의 저력은, 이같은 폭풍을 잠재울만큼 대단했다.
안정성이 현저히 떨어졌던 첫 윈도용 버전을 곧바로 개선시켜 성공리에 시장 진입했으며, 다른 국산 워드프로세서 진용까지 흡수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아래아한글에 보내는 사용자들의 변함없는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잠시의 영광도 그뿐, 국산 워드프로세서의 수난기가 도래했다.
일말의 틈새도 놓치지 않고 MS워드가 맹공을 퍼부었고, 결국 빈사상태까지 몰고 갔다.
사실상의 세계 표준을 손에 쥔 외국SW에 '우물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국산SW가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미약했던 것. 아래아한글 포기 선언은 국내 SW 산업계에 엄청난 충격과 질타를 던졌고, 국산SW의 활로에 대해 진지한 각성과 고민이 시작됐다.
가까스로 기사회생한 한글과컴퓨터는 이제 중국, 일본 등 해외 워드프로세서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7월에는 3년여의 공백 끝에 명실상부한 윈도용 엔진을 장착한 한글 워디안 제품도 출시할 계획이다.
국산 SW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나아가야 있는가? 한글 워드프로세서는 대표적인 국산 SW로 일찌감치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요구받았고, 아직 답변이 끝나지 않았다.
한글 워드프로세스는 바로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바로미터인 것이다.
<권정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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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프로세서 한글2000워드프로세서 한글2000

Posted at 2007. 1. 5. 09:31 | Posted in 한글 소식_정보_관련 글
혹시 한글 2000이라는 워드 프로세서를 아는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저도 한글을 1.0때부터 사용해왔지만 이름만 들었을뿐 한번도 사용을 못해 봤습니다.  이 제품이 먼저 출시되었으나 이후 나온 한글의 인기 때문에 사용자가 극히 없었습니다. 그 시절 잡지에서 그런 워드프로세서가 있다는 것만 들었을뿐입니다.

한글 2000 개발자 중의 한분이 현재 씽크프리 오피스를 개발하고 있는 한컴 씽크프리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강태진 사장입니다.  한글 2000 이후에 국내에 사임당이라는 워드프로세서를 내 놓았는데 저도 그때 데스크젯 500 프린터를 사면서 번들로 받아서 사용해 보았습니다.  기능은 한글 1.5와 비슷하고 벡터 방식이었지만 속도가 느리고 해서 그리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임당 이외에 틀마름이라는 폼프로세서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것도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후 한컴으로 들어와 개발하다 아래 글에서처럼 다시 회사를 창업하여 나가게됩니다. 그게 아래 기사 말미에 실렸군요.

그 이후 외부로 나가서 자바 기반의 오피스 프로그램인 씽크프리를 만들게 되지요. 어떤 OS(윈도, 리눅스, 매킨토시 환경)에서도 다 동작을 하여 언론에서도 호평을 하였으나 자바 기반의 시장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고전을 하게 되고  다시 한컴으로 인수되어 씽크프리 오피스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한글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2000에 대한 잡지 기사 내용입니다.

[IT타임머신] 워드프로세서 한글2000
2000년 12월 06일
글 유춘희 (point@dot21.co.kr)  


외국서 만들어진 최초의 한글 워드
  80년대 중반 PC가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고유문자를 가진 우리나라에도 컴퓨터용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했다. 한국과학기술원과 고려씨스템이 함께 개발한 ‘명필 시리즈’, 금성소프트웨어가 행정전산망용으로 개발해 공문서 작성용으로 납품하던 ‘하나 워드프로세서’, XT 시절을 풍미하던 삼보컴퓨터의 ‘보석글’은 한국 워드프로세서 개척자였다. ‘글벗’이라는 제품을 개발한 삼성전자는 ‘훈민정음’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도 자사 PC에 번들로 제공하고 있다.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새로운 장을 연 제품은 ‘아래아한글’이다. 이찬진, 김형집, 우원식 3명의 대학생이 개발한 아래아한글은 공개소프트웨어로 뿌려져 사용자들 인기를 독차지했다.  
대기업이 자사 PC에 넣기 위해 개발한 게 아니라, 어떤 PC에서나 쓸 수 있도록 한 독립 제품이라는 데 의의가 컸다. 그런 명품이 또 하나 있었으니 아래아한글보다 2년쯤 선배가 되는 ‘한글2000’이다. 사람들은 이 제품을 한국 워드프로세서의 진정한 첫 제품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글2000은 누구나 돈만 내면 살 수 있는 최초의 제품이었다. 88년에 처음 선보인 이 제품은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20대 후반의 동포 3명이 설립한 ‘한컴퓨터연구소’ 이름으로 나왔다. 팀 리더는 정재열. 프로그래밍은 강태진이 맡았고 한석주가 뒤를 받쳤다. 당시 서울대 기계공학과 학생으로 한글2000을 접한 이찬진이 버그를 여러개 잡아내 강태진에게 보냈지만 반응이 없자, 그렇다면 내가 한번 만들어보자고 덤벼들었다 만든 게 아래아한글이란 얘기도 있다.

한글을 사랑한 고교 동창생 세 명
  한컴퓨터연구소는 한국인으로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꼽히는 텔레비디오(TeleVideo) 황규빈 사장을 만나면서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했다. 황 사장은 개발비용 모두를 부담하기로 하고 텔레비디오 PC에서만 쓸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를 만들어달라고 제안했다. 80년대 말 갑일전자가 팔던 텔레비디오 제품 속 워드프로세서는 한컴퓨터연구소가 만든 제품이다.

  미국과 캐나다 동포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던 이 제품은 88년 직접 한국 정벌에 나선다. 당시 유일한 범용 한글 워드프로세서인 ‘팔란티어 워드프로세서’와 최고 인기 제품인 삼보의 ‘보석글’을 제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한국에 소프트웨어저작권법이 만들어졌다는 소식도 그들에게 힘이 됐다.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서울 종로구 와룡동 한글문화원. 안과의사이면서 한글사랑이 남달랐던 공병우 박사의 개인연구실이었다. 이곳은 한글과컴퓨터가 초기에 입주했던 곳이기도 해 한글 워드프로세서 개발의 산실이 된다. 공 박사와 한컴퓨터연구소는 83년 이들이 애플Ⅱ용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했을 때, 공 박사가 자신이 개발한 세벌식자판 기능을 첨가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한글2000은 워드프로세서와 스프레드시트인 칼크, 데이터베이스인 카드를 포함한 통합 사무자동화 패키지였다. 매킨토시 인터페이스를 흉내낸 풀다운 메뉴 방식은 획기적이었고, 한글 카드가 필요 없었으며, 편집 모양을 그대로 보여주는 ‘위지윅’ 기능이 독보적이었다. 나중에 한글2000은 ‘사임당’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워드프로세서에 그래픽과 사진을 구현할 수 있는 최초의 제품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사임당은 아래아한글의 벽을 넘지 못하고 94년 말 한글과컴퓨터에 흡수되고 만다. 당시 한글과컴퓨터는 핸디소프트의 워드프로세서인 ‘아리랑’이 그룹웨어 ‘핸디오피스’에 붙어 강력한 대항군으로 떠오르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글과컴퓨터는 한컴퓨터연구소 개발진을 흡수해 그룹웨어 개발에 나섰고, 사장이던 강태진은 한글과컴퓨터 그룹웨어 개발이사로 옮겨 앉았다. 워드2000의 후신인 사임당은 2.1 버전까지만 개발됐다.

  한글2000을 만든 고교 동창생 3명은 지금 무엇을 할까. 강태진씨는 한글과컴퓨터를 나와 자바 개발업체인 제이소프트를 창업했고, 지금은 개인용 자바 애플리케이션 ASP 업체 씽크프리 사장으로 있다. 초기 한컴퓨터연구소 대표였던 정재열씨는 캐나다에서 저장장치 아웃소싱 업체인 스토리지ASP의 CTO(최고기술담당임원)로 재직 중이고, 한석주씨는 정보기술과 동떨어진 분야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DOT21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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