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아한글 개발자, 정내권 엠트레이스 대표 인터뷰아래아한글 개발자, 정내권 엠트레이스 대표 인터뷰

Posted at 2012. 11. 28. 11:15 | Posted in 신문 기사

한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현 드림위즈 이찬진 사장님일 겁니다.   한글 개발에 관해서는 그에 못지 않게 작업을 하신 분이 정내권씨가 있습니다. 오늘 그 분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났군요.  


그래서 한번 옮겨 봤습니다.


http://goo.gl/valQN





초등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본 사람, 소아마비로 평생 휠체어를 못 벗어난 사람, 하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선 안철수, 이재웅보다 더 유명했던 미다스의 손. 우리가 흔히 아래아한글이라고 부르는 한글프로그램을 만들었던 사람, 그래서 개발자들 사이에선 ‘신(神)’이라 불렸던, 전설적인 이름. 바로 정내권(45)이다. 


기자의 사무실이 있는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의 한 건물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눈인사를 하게 되었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에 유독 눈에 띄었던 그가 알고 보니 바로 정내권이었다. 그는 컴퓨터 천재들이 모여들고, 트렌드가 정신없이 팽팽 돌아 가는듯한 실리콘밸리 한가운데서 혼자 묵묵히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다. 


걷지 못하는 시골 소년에게 PC가 생겼다 

학교는커녕 걷지도 못하는 한 시골소년이 PC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 스토리는 전설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가 어릴 때만 해도 전라도 광주는 시골이었고, 휠체어를 타고 통학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늘 혼자였고, 집안에만 있었다. 


“걷거나, 뛰거나, 밖에 나가 놀거나, 학교를 다니거나 했던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시절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뭔가 주어졌다가 박탈당했으면 힘들었겠지만,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적응했던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특별한 성장과정을 담담히 말했다. 어렵고 힘든 유년의 기억조차 성공스토리를 위한 스펙으로 드러내놓기도 하는 세상에서 그는 그저 담담히 추억할 뿐이었다. 


열 여덟 살, 박탈당한 기억조차 없을 만큼 가진 적이 없던 그에게도 대단한 그 무엇이 주어졌다. 대우전자에서 만든 8비트 PC. "컴퓨터라는 게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래서 무작정 컴퓨터 잡지 한 권을 샀죠.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몇 권을 마르고 닳도록 보고 또 보니까 조금씩 이해가 되더군요.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한대 장만했는데, 그때부터 내 안에 참았던 어떤 것이 막 분출되기 시작했어요. 몰입이랄까요? 머릿속에 오직 컴퓨터밖에 없는 몰입이 시작됐던 거죠.”


그렇게 컴퓨터와 자신을 구분할 수 없었을 정도로 몰입했던 그는 딱 2년 후 스무 살 때부터 소스코드를 작성해 컴퓨터잡지에 기고하면서 평생 처음으로 집밖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 몸이 아니라 정.내.권.이라는 컴퓨터전문가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리고 스물 세 살이 되던 1980년대 후반 그는 서울로 상경했다. PC통신으로 알게 된 박흥호 전 나모인터랙티브 사장(당시 국어교사)의 권유로 서울 종로구 한글 문화원에 합류했다. 한글문화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안과의사인 공병우 박사가 한글 과학화를 위해 설립한 연구소. 그는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 박사의 세벌식입력기 소프트웨어 작업을 도왔다. 이곳에서 이찬진 사장을 만나게 되었고, 이 사장이 경영에 주력하는 동안 그는 도스용 한글에서부터 한글 2002까지 만들어냈다.


“주어진 조건에 비해 운이 좋았던 거죠.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왔다기 보단, 열심히 빠져있다 보니 의도치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들이 많았어요. 무엇보다 제가 불편한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가장 큰 행운이었죠.” 박흥호, 공병우, 이찬진… 그의 불편한 부분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재능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던 이름들이다. 


도전조차 안 하면 성공가능성은 제로

그는 이찬진 사장이 한컴을 그만둘 때 함께 나와 드림위즈를 같이 만들었고, 이후 드림어플라이언스라는 회사를 설립해 드디어 정 대표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웹소프트웨어에서 모바일로 확 건너뛰었다. 그게 십 수년 전일이다. “유선인터넷의 의사소통기능이 휴대폰에 접목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예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빨랐던 탓일까? 새로운 세상은 쉽게 열리지는 않았다. 한 대기업 휴대폰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공급했지만, 그의 표현대로 ‘한국의 대기업과 일해서 돈 벌기는 쉽지 않기에’ 그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다 그는 2008년 “왠지 중원에 나가고 싶어서” 무림의 고수처럼 실리콘밸리로 나섰다. 30여명 직원은 한국에서 개발과 영업을 하고, 그는 가족만 데리고 나왔다. “나이도 많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인맥이나 학맥도 없었고 해서 마음 속으로만 꿈꾸고 결행을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런 불편한 조건들이 큰 문제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학력 난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조건도, 대문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조건도 담담히 생각해왔는데, 그 따위 불편한 것들이 무슨 문제이랴. 


미국에 와서 처음 2년은 인스타그램처럼 사진을 편집해서 소셜네트워크로 공유하는 서비스, 날씨정보를 제공하는 앱 등 소비자들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녹록하지 않았다.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바일 서비스는 굉장히 감각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나이가 중년이 되고 보면 다들 느끼게 되는 고뇌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트렌드, 새로운 서비스는 머리로 따라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젊은이들이 왜 열광하는지 그건 이해하는 게 아니라 체득해야 하는 거니까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겠다 싶었죠. 그렇게 해서 찾은 게 바로 기업용 모바일 소프트웨어였습니다.”


그는 기업용 소프트웨어시장에서의 패러다임 변화에 주목했다. 기업의 업무환경이 클라우드와 모바일을 통해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는 사실. 기업용 이메일 소프트웨어, 기업용 CRM솔루션, 클라우드 기반의 기업내 모바일 매니지먼트서비스 등이 현재 그가 주력하고 있는 아이템이다. 


‘컴神’이라 불리던 내공에 비하면 아직은 작지만 올해 엠트레이스의 매출 예상액은 50억원. 그가 한컴에서 나와 독립한 이후부터 따져보면 가장 큰 액수이다. 모토로라는 구글에 인수됐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그의 이메일 소프트웨어를 전 기종에 탑재했다. 실리콘밸리가 이제야 신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 그는 이제 미국에서의 영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현지직원들도 채용할 예정이다. 


야후도 못하는 걸, 젊은 친구 혼자서 뚝딱한다

정 대표는 4년 전과 지금 실리콘밸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실리콘밸리는 화려하고 공정한 무대 같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유리벽안에서 굉장한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곳’입니다. 인맥에 의해 성공이 좌우되고, 빤히 눈앞에 보이지만 유리벽 때문에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무대 말이죠.” 


그가 4년여 실리콘밸리에 도전하면서 짚어낸 세 가지는 이렇다. 첫 번째 “물론 유리벽이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어요. 야후 같은 대기업이 무슨 서비스를 시작하면 망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젊은 친구가 혼자 어디 처박혀서 뚝딱 만들어낸 서비스는 크게 성공하더라는 거죠. 제 눈으로 수없이 봐왔어요. 그게 지금처럼 빛의 속도로 변하는 트렌드를 거대기업보다 그 트렌드 속에 있는 한 청년이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한국의 젊은이들이 불쌍하다는 겁니다. 자질과 능력에 걸맞은 대접을 못 받고 있지요. 어떤 젊은이가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도 대기업에서 똑같은 것을 만들어버리면 이내 먹히고 맙니다. 실리콘밸리보다 실패확률이 더 높아요. 설령 성공해도 이곳처럼 대박이 날 수가 없어요. 열매도 작지요. 한국에서 이쪽 분야는 정말 아직도 척박합니다.”


그러면서 정 대표는 “아무리 현실이 척박해도 꿈까지 작아서는 안 된다”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당부했다. “한국의 젊은 친구들이 만드는 제품을 보면, 거기에 담긴 꿈의 사이즈가 참 현실적이에요. 작다는 겁니다. 크게 꿈꾸면 크게 다칠까봐 그렇겠지요. 워낙 현실이 척박하니까. 그러나 아무리 시시하게 출발해도 최종목표는 거대해야 합니다. 왜냐면 잠재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드는 서비스나 제품을 쓸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그런 서비스나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빛의 속도로 변한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제가 콕 박혀서 컴퓨터에 몰두했던 시간들, 몰입했기 때문에 정말 행복했던 그 시간들이 예나 지금이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말이죠. 그런 시간들에 비하면 간판과, 인맥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전라도 시골마을이 아니라, 실리콘밸리에서 또 한 번 충분히 혼자 몰입의 시간을 보낸 컴新 정내권 대표가 만들어낼 새로운 전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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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글 개발자 인터뷰 기사최초의 한글 개발자 인터뷰 기사

Posted at 2012. 11. 9. 17:23 | Posted in 한글 관련 자료

아래에 최초의 한글 개발자 동영상(MBC 뉴스)를 올렸습니다. 


최초 한글 워드 프로세서 관련 MBC 뉴스


이후 이 분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했는데 관련 기사가 있네요. 


원본 : [발굴인터뷰] “스티브잡스를 꿈꿨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 동아일보 2011년 10월 19일 기사

http://news.donga.com/3/all/20111019/41215629/1


국내 최초의 PC용 소프트웨어 개발자 박현철 씨

●1980년대 국내최초 컴퓨터 스타, 대기업 제의 뿌리치고 독립군으로…

●"소프트웨어 전문가를 꿈꾸었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개발자 박현철.

"서울 청계천 전자부품부속가게에서 '박현철'을 찾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교생으로 우리말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한 박현철(17세·서울북공고2년) 군은 전문가들도 하기 힘든 일을 해낸 것이다" [1983년 1월22일자 동아일보 '금주의 얼굴']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잡스의 사망과 후 폭풍으로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위기가 재조명 받고 있다. 최고의 하드웨어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빈약한 운영체제(OS) 및 소프트웨어 운용능력으로 하청업체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많던 국내 소프트웨어 인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수소문 끝에 국내 최초의 PC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찾아냈다. 


1980년대 초반은 애플컴퓨터가 몰고 온 '개인용 컴퓨터(PC)' 충격으로 이른바 전 세계 실리콘밸리들이 기지개를 펴던 시기다. 한국에서도 애플호환 컴퓨터가 청계천 시장을 중심으로 애플 모방품이 활발하게 조립 제작되던 시절이었다.


놀랍게도 '한국판 실리콘밸리' 청계천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장본인은 1983년 당시 17살 서울북공고 전자과 학생이던 박현철(45) 씨다.


■ 국내 최초의 한글 워드프로세서…기성세대 충격 


"박 군이 컴퓨터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중학 3년 때,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오디오등 전자제품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온 박 군은 납땜과 전자제품조립으로…컴퓨터는 이용하는 기술(소프트웨어)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베이직 파스칼 포트란 어셈블러 등 소프트웨어를 익혔고…그는 장래 소프트웨어 분야의 제1인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동아일보 1983년 1월18일자)




고교 2학년 시절의 박현철(왼쪽), 1983년 1월18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인 1983년 1월, 대한민국 언론은 10대 컴퓨터 천재를 주목했다. 당시 서울북공고 2학년생인 그는 개인용 컴퓨터(애플2 플러스)를 활용한 한글 최초의 워드프로세서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가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컴퓨터 수재로 이름을 알린 그는 1982년 삼보컴퓨터 회장인 이용태 박사의 허락을 받고 방과 후에 엘렉스 사무실에서 PC를 사용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독학한 어셈블리언어로 한줄 한줄 코딩을 해서 최초의 한글워드프로세서를 만들어 냈다. 이 소프트웨어는 초보적이었지만 한글 입력은 물론 프린터 출력이 가능해 충분히 타자기를 대신에 사무용으로 활용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당시 박 군의 소프트웨어는 컴퓨터를 구입하는 기업들이나 개인들에게는 가장 필수적인 소프트웨어로 인식됐다. 배포를 담당한 삼보컴퓨터 측은 "순식간에 2만 카피가 나갔다"는 통계를 내기도 했다.


또한 청계천에서는 박 군이 등장한 신문기사를 가게 앞에 붙여두며 호객 행위를 할 정도로 그는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이런 큰일을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혼자 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기에 당시 정부는 훈장을 준다고 호들갑을 떨고 대기업들은 '해외 유학'이란 조건까지 내걸고 그를 스카우트하려고 경쟁까지 벌일 정도였다.


심지어 그를 모델로 삼은 '학생과 컴퓨터'라는 잡지가 창간되기도 했다. 미래 한국의 희망이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국내 최초의 워드르포세서를 개발한 그는 29년이 지난 현재 빚에 쪼들린 평범한 IT개발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대기업이 제안한 해외유학 기회를 마다한 그는 이후 조그만 IT업체에 취직한다. 배움이 갈급했던 그는 1987년 모 전문대를 졸업하고는 이후에도 줄곧 중소업체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활약했다.


1990년대에는 잠시 미국에서 활약하기도 했지만 이내 한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한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빚을 지게 됐고, 이후에는 생업을 위해 자신의 개발능력을 활용해온 것이다. 10월18일 여의도 한 사무실 앞에서 그를 만났다. 


■ 포스코에서 '해외유학' 내걸고 스카우트 제의…그러나 거절


-1983년 당시 언론의 관심이 지대했는데…이찬진 씨의 아래아 한글이 1989년이니까 무척 빠른 데뷔였다.


"사실 공짜였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국내 최초의 무상 소프트웨어였던 셈이다. 큰돈을 벌수도 있었겠지만 제 아버지는 학생은 돈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나 역시 컴퓨터에 대한 관심이 전부였다. 당시 주요 매체에서 소프트웨어 천재가 나타났다고 하니 (결국 받지는 못했지만) 정부에서는 훈장을 준다고 나섰고, 대기업에서는 해외유학을 전제로 취업 제의가 쏟아지기도 했다."


-당시 제작한 소프트웨어 이름이…? 


"당시엔 소프트웨어에 이름을 짓는다는 것도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냥 알기 쉽게 '한글워드프로세서 버전 1.0'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버전(version)이란 말을 모르니 비전의 오타 아니냐고 묻기도 했을 정도다. 내가 처음 만들고 이후 대기업들의 워드프로세스가 만들어 졌고 1988년에야 이찬진 씨의 '아래아한글'이 상업용으로 출시됐다. 국내 최초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어째서 그 좋은 제안들을 모두 거절했나?


"당시 우리 부모님은 지방에서 농사짓는 분이어서 적절한 조언을 주는 분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포항제철 대한전선 등 큰 기업들에서 좋은 제안이 많이 왔는데, 어린 마음에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내가 자존심이 셌고 대기업들의 고압적인 자세를 보고 나와 맞지 않다고 느꼈다. 물론 만약 그 때 유학을 갔더라면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 지도 모르겠다."


-이후의 삶의 궤적을 설명해 달라


"꾸준하게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의 삶을 살았다. 1980년대 한일한영 워드프로세서도 개발했고, 한양대 김정수 교수가 창안한 '한글기울어 풀어쓰기' 소프트웨어도 개발했다. 군대 다녀오고 1990년대에 '메아리'로 불리는 팩스모뎀 업체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미국에 갈 기회가 생겨 애틀랜타의 한 업체에서 윈도우용 팩스모뎀 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했다. 그리고 1999년 이후에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사업에 실패하고는 여러 곳의 개발 일에 참여 하고 있다. 초창기 소프트웨어 개발자 가운데서는 내가 가장 성공하지 못한 케이스다."


■ "한국의 소프트웨어 인재가 미래를 결정" 


-인생을 돌이켜 보면 아쉬운 대목이 많을 텐데…


"물론이다. 나도 적절한 조력자를 만났다면 안철수 대표 정도는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웃음) 그러나 고지식한 개발자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내 자식과 후배들에겐 찾아온 기회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다."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가장 안타까운 대목이란


"누가 뭐래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을 육성하고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하청에 재하청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게다가 대기업 SI(시스템통합)업체들이 개발자들을 돈으로 타락시킨 면이 큰 것 같다. 창의적인 개발자들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다. 나 역시 SI분야에서 일해본 적이 있는데 그냥 먹고살기 위한 일일 뿐이었다. 슬픈 일이다."


그런 그는 최신형 삼성 갤럭시S II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애플의 아이폰에 대해 비판하며 우리도 조금만 환경이 좋아지면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 만한 OS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애플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그의 의견 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국내 최초 애플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잡스의 죽음을 바라보는 소회가 있다면?


"개인적으론 동생이 췌장암으로 죽었기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IT산업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의 존재는 '악(惡)'의 측면도 없지 않았다. 사실 국내에서 많은 진보적인 인사들이 잡스를 존경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1984년 매킨토시 이후의 잡스는 폐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온 나쁜 존재다. 그가 현재 벌이는 특허 전쟁도 IT정신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팍스콘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압제적 경영자의 전형이다. 그런데도 한진중공업 김진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를 맹신하는 모습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본다."


-후배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 역시도 젊은 시절에는 자신감에 차있었고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처럼 크게 성공하고 싶었다. 후배들은 개발자로서 자신을 너무 과신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엔지니어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좋지만 좋은 커뮤니케이션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에 한정되어 특정 기술에 매달리기 보다는 다양한 연관 기술을 꾸준하게 공부했으면 좋겠다. 특히 웹 개발 같은 트렌디한 기술 보다는 소프트웨어 본연의 기술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업만큼은 엔지니어 기준으로 안했으면 좋겠다. 보다 많은 재능 있는 후배들이 IT분야로 오기 위해서는 내가 성공했어야 하는데 사실 그 점이 미안하다." 


그는 29년 전 어색한 양복을 입고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에서 인터뷰 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년이 국내 첫 PC소프트웨어 30주년이 된다는 얘기에, "아, 그렇군요…내년에는 조촐한 기념식이라도 마련해보겠다"고 말하고 총총히 자신의 일터로 되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에서 초라한 한국의 소프트웨어 천재들의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보였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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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한글 워드 프로세서 관련 MBC 뉴스 및 신문 기사최초 한글 워드 프로세서 관련 MBC 뉴스 및 신문 기사

Posted at 2012. 11. 9. 17:15 | Posted in 한글 관련 자료

최초의 한글 워드 프로세서하면 아마 많은 분들이 한글(아래아 한글)을 말할 겁니다. 하지만 한글 이전에도 몇 개의 워드 프로세서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삼보의 보석글입니다.   이후  사용하기 쉽게 WYSWYG  방식으로 개발된 한글이 나오면서 국내에서는 한글이 가장 많이 사용됩니다.


이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 보다 먼저 기본적인 한글 워드 프로세서 이야기가 나오네요.  박현철씨(당시 17세)가 만든 한글 워드프로세서에 대한 TV 기사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동영상이네요.


 


 


 


MBC News Desk 1983-1-16 [일요화제] 최초 한글 워드 프로세서 개발자 박현철


25초 정도부터 한글 워드 프로세서에 대해 나옵니다. 



아울러 동아일보 1983년 1월 22일자 인터뷰 기사도 있습니다.

http://goo.gl/JzYXv : 크롬에서는 안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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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용 한컴오피스 한글 출시안드로이드용 한컴오피스 한글 출시

Posted at 2012. 11. 1. 11:43 | Posted in 모바일 한글

iOS용 한컴오피스 한글이 출시된데 이어 Android용 한컴오피스 한글이 출시되었습니다.  



안드로이드 한글 다운로드로 이동 : http://goo.gl/2eKCK


출시 기념으로 정가 19,900원에서 할인한 가격인 14,900원에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기기에서 한글 문서나 워드 문서를 보거나 편집하려면 안드로이드용 한컴오피스 한글을 구매해 보세요.


아직 모든 단말기를 다 지원하지는 않고 갤럭시 탭이나 갤럭시 노트와 같은 태블릿에서만 정상 동작하고 다른 기기에서는 받아지는 기기도 있고 안 받아지는 기기도 있네요.  




★ '한컴오피스 한글 안드로이드 에디션' 출시 기념 이벤트 ★

11월 30일까지 정가(19,900) 보다 저렴한 가격(14,900원)으로 제품을 구매하실 수 있어요.

지금 바로 고~고~고!!


■ 본 제품의 현재 버전은 '갤럭시 탭 10.1’, '갤럭시 노트 10.1’,‘구글 넥서스 7'을 지원합니다. 이 외의 단말기에서는 제품이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한컴오피스 한글 안드로이드 에디션 ★★


■ 제품 설명

한컴오피스 한글 안드로이드 에디션은 쉽고 빠르게 문서(hwp, docx)를 만들거나 편집할 수 있는 문서 편집 프로그램입니다. 

한컴오피스 한글 안드로이드 에디션을 사용하면 문서 레이아웃 변경, 표/도형 같은 개체 삽입 등 다양한 기능을 사용하여 문서를 편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새 폴더 생성하거나 문서를 이동/복사/삭제할 수 있는 파일/폴더 관리 기능도 제공합니다.


■ 권장 사양

- 지원 OS : Android 3.x 4.0.x, 4.1.x 탑재 태블릿

- 지원 단말기 : 갤럭시 탭 10.1, 갤럭시 노트 10.1, 구글 넥서스 7

- 권장 용량 : 82MB 이상


■ 주요 기능

- 표, 도형, 이미지 등 개체 삽입

- 글자 모양, 문단 모양 변경

- 암호 문서, 옛 한글 지원

- 작업 중인 문서 첨부 파일로 보내기

- 파일/폴더 관리 기능

- 새 문서/새 폴더 생성

- 문서 검색

- 디바이스 내 파일/폴더 관리 기능(이름 변경, 복사, 이동, 삭제 등 기능 제공)


■ 지원 형식

- 불러오기: HWP, RTF, DOC, DOCX

- 저장하기: HWP, DOCX

■ 지원 언어

한국어, 영어

■ 유의 사항

1. 모바일용으로 제작된 글꼴 탑재로 일부 기호 및 한글과 영문을 제외한 영역의 표현이 올바르게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원본 문서에 지정된 글꼴이 모바일용 글꼴로 변경되어 나타날 수 있으며, 문서의 레이아웃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3. OLE 개체, 차트, 양식 개체, 한/글 문서에 포함된 소리/ 동영상/ 플래시, 일부 이미지(AI, CDR, CGM, DRW, DXF, EMF, EPS, HDR, PIC, PICT, PLT, TIFF, WPG 등), 이미지 효과는 현재 지원되지 않습니다.

단, [모바일 최적화 문서로 저장하기] 기능으로 저장한 문서에 포함된 OLE 개체, 차트, 양식 개체는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4. 이메일 첨부 문서 보기의 경우 HWP MIME TYPE 형식으로 수신된 메일만 지원됩니다.

5. 지원하는 단말기는 ‘갤럭시 탭 10.1’, ‘갤럭시 노트 10.1’, ‘구글 넥서스 7’로 이 외의 단말기에서는 제품이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6. 추후 다른 태블릿이나 스마트폰도 지속적으로 지원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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