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아한글 개발자, 정내권 엠트레이스 대표 인터뷰아래아한글 개발자, 정내권 엠트레이스 대표 인터뷰

Posted at 2012. 11. 28. 11:15 | Posted in 신문 기사

한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현 드림위즈 이찬진 사장님일 겁니다.   한글 개발에 관해서는 그에 못지 않게 작업을 하신 분이 정내권씨가 있습니다. 오늘 그 분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났군요.  


그래서 한번 옮겨 봤습니다.


http://goo.gl/valQN





초등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본 사람, 소아마비로 평생 휠체어를 못 벗어난 사람, 하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선 안철수, 이재웅보다 더 유명했던 미다스의 손. 우리가 흔히 아래아한글이라고 부르는 한글프로그램을 만들었던 사람, 그래서 개발자들 사이에선 ‘신(神)’이라 불렸던, 전설적인 이름. 바로 정내권(45)이다. 


기자의 사무실이 있는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의 한 건물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눈인사를 하게 되었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에 유독 눈에 띄었던 그가 알고 보니 바로 정내권이었다. 그는 컴퓨터 천재들이 모여들고, 트렌드가 정신없이 팽팽 돌아 가는듯한 실리콘밸리 한가운데서 혼자 묵묵히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다. 


걷지 못하는 시골 소년에게 PC가 생겼다 

학교는커녕 걷지도 못하는 한 시골소년이 PC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 스토리는 전설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가 어릴 때만 해도 전라도 광주는 시골이었고, 휠체어를 타고 통학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늘 혼자였고, 집안에만 있었다. 


“걷거나, 뛰거나, 밖에 나가 놀거나, 학교를 다니거나 했던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시절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뭔가 주어졌다가 박탈당했으면 힘들었겠지만,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적응했던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특별한 성장과정을 담담히 말했다. 어렵고 힘든 유년의 기억조차 성공스토리를 위한 스펙으로 드러내놓기도 하는 세상에서 그는 그저 담담히 추억할 뿐이었다. 


열 여덟 살, 박탈당한 기억조차 없을 만큼 가진 적이 없던 그에게도 대단한 그 무엇이 주어졌다. 대우전자에서 만든 8비트 PC. "컴퓨터라는 게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래서 무작정 컴퓨터 잡지 한 권을 샀죠.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몇 권을 마르고 닳도록 보고 또 보니까 조금씩 이해가 되더군요.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한대 장만했는데, 그때부터 내 안에 참았던 어떤 것이 막 분출되기 시작했어요. 몰입이랄까요? 머릿속에 오직 컴퓨터밖에 없는 몰입이 시작됐던 거죠.”


그렇게 컴퓨터와 자신을 구분할 수 없었을 정도로 몰입했던 그는 딱 2년 후 스무 살 때부터 소스코드를 작성해 컴퓨터잡지에 기고하면서 평생 처음으로 집밖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 몸이 아니라 정.내.권.이라는 컴퓨터전문가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리고 스물 세 살이 되던 1980년대 후반 그는 서울로 상경했다. PC통신으로 알게 된 박흥호 전 나모인터랙티브 사장(당시 국어교사)의 권유로 서울 종로구 한글 문화원에 합류했다. 한글문화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안과의사인 공병우 박사가 한글 과학화를 위해 설립한 연구소. 그는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 박사의 세벌식입력기 소프트웨어 작업을 도왔다. 이곳에서 이찬진 사장을 만나게 되었고, 이 사장이 경영에 주력하는 동안 그는 도스용 한글에서부터 한글 2002까지 만들어냈다.


“주어진 조건에 비해 운이 좋았던 거죠.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왔다기 보단, 열심히 빠져있다 보니 의도치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들이 많았어요. 무엇보다 제가 불편한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가장 큰 행운이었죠.” 박흥호, 공병우, 이찬진… 그의 불편한 부분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재능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던 이름들이다. 


도전조차 안 하면 성공가능성은 제로

그는 이찬진 사장이 한컴을 그만둘 때 함께 나와 드림위즈를 같이 만들었고, 이후 드림어플라이언스라는 회사를 설립해 드디어 정 대표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웹소프트웨어에서 모바일로 확 건너뛰었다. 그게 십 수년 전일이다. “유선인터넷의 의사소통기능이 휴대폰에 접목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예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빨랐던 탓일까? 새로운 세상은 쉽게 열리지는 않았다. 한 대기업 휴대폰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공급했지만, 그의 표현대로 ‘한국의 대기업과 일해서 돈 벌기는 쉽지 않기에’ 그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다 그는 2008년 “왠지 중원에 나가고 싶어서” 무림의 고수처럼 실리콘밸리로 나섰다. 30여명 직원은 한국에서 개발과 영업을 하고, 그는 가족만 데리고 나왔다. “나이도 많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인맥이나 학맥도 없었고 해서 마음 속으로만 꿈꾸고 결행을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런 불편한 조건들이 큰 문제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학력 난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조건도, 대문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조건도 담담히 생각해왔는데, 그 따위 불편한 것들이 무슨 문제이랴. 


미국에 와서 처음 2년은 인스타그램처럼 사진을 편집해서 소셜네트워크로 공유하는 서비스, 날씨정보를 제공하는 앱 등 소비자들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녹록하지 않았다.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바일 서비스는 굉장히 감각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나이가 중년이 되고 보면 다들 느끼게 되는 고뇌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트렌드, 새로운 서비스는 머리로 따라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젊은이들이 왜 열광하는지 그건 이해하는 게 아니라 체득해야 하는 거니까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겠다 싶었죠. 그렇게 해서 찾은 게 바로 기업용 모바일 소프트웨어였습니다.”


그는 기업용 소프트웨어시장에서의 패러다임 변화에 주목했다. 기업의 업무환경이 클라우드와 모바일을 통해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는 사실. 기업용 이메일 소프트웨어, 기업용 CRM솔루션, 클라우드 기반의 기업내 모바일 매니지먼트서비스 등이 현재 그가 주력하고 있는 아이템이다. 


‘컴神’이라 불리던 내공에 비하면 아직은 작지만 올해 엠트레이스의 매출 예상액은 50억원. 그가 한컴에서 나와 독립한 이후부터 따져보면 가장 큰 액수이다. 모토로라는 구글에 인수됐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그의 이메일 소프트웨어를 전 기종에 탑재했다. 실리콘밸리가 이제야 신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 그는 이제 미국에서의 영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현지직원들도 채용할 예정이다. 


야후도 못하는 걸, 젊은 친구 혼자서 뚝딱한다

정 대표는 4년 전과 지금 실리콘밸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실리콘밸리는 화려하고 공정한 무대 같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유리벽안에서 굉장한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곳’입니다. 인맥에 의해 성공이 좌우되고, 빤히 눈앞에 보이지만 유리벽 때문에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무대 말이죠.” 


그가 4년여 실리콘밸리에 도전하면서 짚어낸 세 가지는 이렇다. 첫 번째 “물론 유리벽이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어요. 야후 같은 대기업이 무슨 서비스를 시작하면 망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젊은 친구가 혼자 어디 처박혀서 뚝딱 만들어낸 서비스는 크게 성공하더라는 거죠. 제 눈으로 수없이 봐왔어요. 그게 지금처럼 빛의 속도로 변하는 트렌드를 거대기업보다 그 트렌드 속에 있는 한 청년이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한국의 젊은이들이 불쌍하다는 겁니다. 자질과 능력에 걸맞은 대접을 못 받고 있지요. 어떤 젊은이가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도 대기업에서 똑같은 것을 만들어버리면 이내 먹히고 맙니다. 실리콘밸리보다 실패확률이 더 높아요. 설령 성공해도 이곳처럼 대박이 날 수가 없어요. 열매도 작지요. 한국에서 이쪽 분야는 정말 아직도 척박합니다.”


그러면서 정 대표는 “아무리 현실이 척박해도 꿈까지 작아서는 안 된다”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당부했다. “한국의 젊은 친구들이 만드는 제품을 보면, 거기에 담긴 꿈의 사이즈가 참 현실적이에요. 작다는 겁니다. 크게 꿈꾸면 크게 다칠까봐 그렇겠지요. 워낙 현실이 척박하니까. 그러나 아무리 시시하게 출발해도 최종목표는 거대해야 합니다. 왜냐면 잠재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드는 서비스나 제품을 쓸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그런 서비스나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빛의 속도로 변한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제가 콕 박혀서 컴퓨터에 몰두했던 시간들, 몰입했기 때문에 정말 행복했던 그 시간들이 예나 지금이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말이죠. 그런 시간들에 비하면 간판과, 인맥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전라도 시골마을이 아니라, 실리콘밸리에서 또 한 번 충분히 혼자 몰입의 시간을 보낸 컴新 정내권 대표가 만들어낼 새로운 전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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